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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do

기생수 해석 본문

겨겨울

기생수 해석

2025. 1. 21. 23:25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인 치치직은 21일부터 내달 20일까지

애니메이션 '기생수'를 '같이보기' 서비스를 한다.

 

다소 철학적인 내용이라 직관적으로 이해가 힘든 부분이 있다.

이에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려 한다.

 

아래에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를.

 

기생생물이 기생수일까?

 

자칫 기생수가 기생생물을 지칭하는 단어로 인식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실질 기생수라는 단어는 단 한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시장 히로카와 다케시의 죽기 전 연설에서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로 '기생수'가 처음 사용된다.

 

기생충을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로 바꾸며 벌레 충 '蟲'을 짐승 수 '獸'로 대체한 것이다.

인간도 범의적으로 본다면 '짐승'의 한 부류이기 때문이다.

 

반면 기생생물은 짐승으로 분류할 수 없기에 기생수라 부를 수 없다.

생물학적 계통이 명확지 않은 기생생물은 기생생물이라 부르는 게 가장 적절하다.

 

사족으로 다케시의 연설은 개인적으로도 명장면으로 꼽는 장면이다.

제목의 의미를 드러냄과 동시에, 일반적인 선악 구도를 흔드는 충격적인 반전이 있기 때문이다.

'기생수'의 진짜 의미부터 시장의 정체에 이르는 연이은 반전은 연출적으로도 상당히 뛰어나다.

연설 내용 중 '살인보다 쓰레기 방류가 더 큰 죄악'이라는 말 역시

고토의 죽음을 통해 수미상관을 이룬다.

 

기생생물은 왜 인간을 죽일까?

 

처음 이를 '지구의 명령'이라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 말미 주인공 이즈미 신이치에 기생한 '오른쪽이'는

고토의 분노를 이야기하며 인간의 머리를 먹으며 분노를 가지게 된 것이라 한다.

 

작품에서도 반복하여 '인간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 말하듯,

인간을 죽이는 기생생물의 행위는 인간의 머리를 먹음으로써 얻게 된 성향 아닌가 싶다.

 

실질 인간의 머리를 먹지 않은

'오른쪽이'나 우다 마모루의 '죠'는 이런 성향이나 폭력성을 보이진 않는다.

특히 '죠' 경우 입을 대체하였음에도 인간에 대한 식욕을 보이진 않는다.

 

작가는 시장 히로카와 다케시의 논리를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

 

시장 다케시는 인간임에도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해악을 이야기하며

그 천적인 기생생물을 지켜야 한다 말한다.

그리고 지구의 입장에서 인간을 '기생수'로 지칭한다.

 

이를 작품의 주제로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 말미 고토의 죽음 앞에 고민하는 신이치를 보며 오른쪽이는

"지구를 위한다는 건 위선이다"라며 충고를 한다.

 

인간이며 인간의 반대 입장을 말하던 다케시,

하지만 기생생물인 오른쪽이의 말을 빌어 이를 반박한 것이다.

인간과 기생생물, 서로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구를 위한다는 건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지구를 위한다는 것은 위선이고 모순일 뿐이다"

 

물론 이를 다케시의 논리에 대한 전면 반박으로 보기는 힘들다.

'인간의 해악은 인정하지만, 최소한 자기애는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정도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다.

또 역으로 '인간 눈에 혐오스러워도, 그 존재는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란 해석도 가능하다.

 

즉 다케시의 극단적인 논리와 오른쪽이의 반박은 변증법적 접근으로

작품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 입장을 지향한다 볼 수 있다.

 

나에겐 해악처럼 보이지만 모두에겐 필요한 존재일 수 있고

나에겐 필요한 존재일 수도 있지만 모두에겐 해악일 수도 있는, 그런 입장인 것이다.

혹은 전체적 '사실의 문제'와 개인의 삶에 이를 반영하는 '가치판단의 문제'를 분리하였다 볼 수도 있다.

 

그렇게 신이치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 아닌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다.

고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을 지키기 위해 고토의 죽음이 필요했을 뿐이다.

 

사실 이는 신이치와 오른쪽이를 통해 계속 보이던 대비이기도 하다.

 

자신을 위해서 다른 존재의 죽음을 불사하는 오른쪽이와

주변을 먼저 생각하며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던 신이치, 이 둘의 갈등도 결국 타협을 본 것이다.

나를 위해서 vs 지구를 위해서, 생존 욕구 vs 전 지구적, 이런 구도는 작품 초반부터 이어져 왔던 셈이다.

 

하여튼 작품 기반에 이런 변증법적 접근이 깔려있다.

만약 작품을 감상함에 선악에 명백한 선을 긋고 답을 찾으려 한다면,

계속 자신의 생각이 반박당하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연하게 사고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살인마 우라가미의 등장 이유는?

 

우라가미는 "인간은 역사를 통해 인간을 죽여왔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자신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며 신이치에게 그에 대한 공감을 얻고자 한다.

아무래도 인간에게는 공감을 얻기 힘드니,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라도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하지만 살인마의 논리는 신이치조차 공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살인마의 사고방식에 불과했다.

그렇게 우라가미는 동정의 여지도 없이 자신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다.

 

그저 순수한 악역이었던 셈이다.

작가가 굳이 자신의 사고관을 비판의 대상에 투영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작가가 살인마를 등장시킨 이유는 그의 그릇된 논리를 부정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이것 또한 변증법이다.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고 이를 부정하며 그 반대의 주제를 강화하려는 의도라 봐야 한다.

 

오히려 주제 의식은 살인마의 논리와는 정반대로, 잔혹한 인간의 역사에 대한 반성에 가깝다.

 

인간이 그런 역사를 보여왔다는 것은 현실이고,

그것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행위 자체를 긍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현실과 가치판단의 문제는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잘못을 저질렀는데, 이미 저질렀으니 옳다'라는 식의 논리는 틀렸다는 말이다.

 

살인마의 논리는

인류의 역사를 핑계로 개인의 그릇된 행동을 합리화하는,

극단주의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했을 뿐이다.

 

마지막화의 제목은 '기생수'이다.

 

 

사족으로 주요한 대사에 대한 해석을 추가하면.

 

"돌아왔다"의 뜻은?

 

'돌아왔다'는 말은 단순 복귀의 의미도 있지만,

철학적인 고민에서 '돌아왔다'라는 '성숙'의 의미도 있다.

또한 작품에서는 상실된 감정의 복구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은 행복도 있고,

이를 열고 현실과 대면하며 절망에 빠지거나 이에 지나치게 심취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희망을 말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작품 말미 고토의 죽음을 두고 신이치가 고민을 하는 모습 역시 그런 것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이를 개인의 삶에 적용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중반에는 잃은 눈물 혹은 감정을 되찾았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말이다.

 

이는 작중 거론된 '이기적 유전자'나 회의론에 대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질 리처드 도킨스 비롯 회의론을 주장하는 철학자나 과학자 상당수는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이타적이고 가정적인, 의외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돌아온 것이다.

 

반면 이를 접하고 돌아오지 못한 채 극단주의에 빠지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극단적인 혐오, 극단적인 환경보호, 극단적인 허무주의 같은

선과 악이란 이분법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들이다.

 

하여튼 그렇다.

철학적 고민을 하지 않는 이들도 있고, 그 고민에 방황하는 이들도 있고, 또 돌아오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고민 없는 해맑음과 돌아온 이들의 웃음은 같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깊이나 단단함이 다른 것이다.

 

철학이 그런 학문이기도 하다.

깊게 빠졌다가 되돌아오는 것이다.

 

"기생생물은 약한 존재이다"의 뜻은?

 

타미야 료코는 기생생물을 말하며 '약한 존재'라는 표현을 쓴다.

또한 고토에 대하여 '무적이지만 약하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어려운 의미는 아니다.

 

고토는 스스로를 '야생 생물'로 칭했다.

그렇게 고토를 사자에 비유하면 어떨까.

 

'사자는 강하다. 하지만 약하다'

 

사자는 인간에 비해 육체적으로는 강하지만,

집단으로서의 혹은 과학으로 무장한 인간은 이길 수 없다.

또한 이런 강한 존재들이 인간으로 인한 환경오염과 온난화로 멸종을 맞이하고 있다.

 

하여튼 결국 무적이라던 고토는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인하여 죽는다.

 

이는 '살인보다 쓰레기 방류가 더 큰 죄악'이라던 다케시의 연설과도 일맥 상통한다.

 

마지막화의 "(기생생물의) 살인도 맹수의 식사라 하면 된다"라는 뜻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다.

다만 명백히 틀린 말이라 하기도 힘들다.

 

만약 사자가 인간을 죽였다면, 사자를 멸종시켜야 할까?

 

사람을 죽인 사자는 죽여야겠지만,

그것이 사자를 멸종시킬 이유라 할 수는 없다.

 

객체와 집단(종), 그 책임의 문제를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생생물에 대하여는 객체와 집단을 동일시한다.

'기생생물을 멸종시켜야 한다'라는 것을 기본 가정으로 깔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인간이 이런 차이를 두지 않고 판단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모기'와 '인간'에 대하여는 객체와 집단의 차이를 따로 두지 않는다.

어떤 개인의 행동을 이유로 그 집단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하기도 하고, 모기는 보이는 즉시 죽인다.

 

기생생물은 모기에 가까운가, 사자에 가까운가.

 

개인적인 평도 덧붙이면.

 

시각적인 면이나 액션 같은 재미의 측면에서 본다면 불만족스러운 면이 있다.

다만 주제의식이나 철학이 명확하며 또 성숙하다.

그리고 이를 전달하는 이야기의 구성 역시 탄탄한 편이다.

 

어떻게 보면 이전 '같이보기'로 서비스했던 '블리치: 천년혈전'과 정반대의 포지션이라 볼 수도 있다.

'블리치'는 원작의 작화나 캐릭터 디자인 자체가 워낙 뛰어나고 또 애니로 표현된 전투 역시 좋았다.

반면 이야기를 두고 보면 수습 위주의 취약한 구성을 보였으니 말이다.

 

사족으로 전투는 아무래도 '드래곤볼' 영향의 차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드래곤볼' 이후 만화에서 전투라는 것이 큰 변화를 맞이했고,

이후 '원나블'이라 불리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가 그 가지를 탄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드래곤볼' 이후로 전투 자체의 비중이 커졌음은 물론이고,

전투에서의 힘과 속도의 개념, 또 물리적 수준 이상의 기술이나 '기' 같은 무형적인 요소들까지

다양한 시도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런 전투의 반복에서 벗어난 경우도 보이긴 하지만.

 

반면 '기생수'는 그 동시대 혹은 이후의 작품이기는 하나 그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보기는 힘들다.

실질 전투 자체도 비중이 작고 굉장히 단조롭게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계통이 다르다 볼 수 있다.

 

하여튼 선뜻 손은 안 가지만 보고 나면 남는 게 많은,

'고전'이란 명칭이 어울리는 애니 아닌가 싶다.

 

'같이보기'가 좋은 경험을 제공한 셈이다.

같이 본다는 게 재미의 부족을 채우기도 하고,

머리를 모으면 난해함도 줄어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도 만약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또 이야기가 요약된 영화로 먼저 접하지 않았다면,

애니는 끝까지 보진 못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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